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쇼와 덴노 (문단 편집) === 가혹했던 고부 관계 === 아내 [[고준 황후]]는 일본 [[막장 드라마]]를 현실로 찍었다. 큰아들인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려 할 때, [[우익]] 단체까지 동원해가면서 엄청 반대했다. 미치코가 말이 평민이지 [[재벌]]가이자 아시아 최대 제분회사 닛신(日淸) 제분의 장녀에, 외가는 옛 [[화족]]([[백작]]) 소에지마(副島) 가문이었으며, 가문뿐만 아니라 미치코 본인 역시 미모와 지성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당시 공부도 잘해서 명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학생이었다. 미치코가 황태자비가 된 후로, [[나가코 황후]]는 '''악독한 [[시어머니]]의 교과서'''가 무엇인지 아주 제대로 보여주었다. 심지어 [[미치코 황태자비]]가 황후가 된 후로도, [[나가코 태후]]와 그녀의 똘마니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치코 황후]]는 시어머니 나가코 황태후에게 어찌나 시달렸는지, [[1993년]] [[10월 20일]] 만 59세 되던 해에 실어증으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나가코 태후는 그녀 자신이 사망하는 순간인 [[2000년]]까지, 40여년간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미치코 황후를 들들 볶았다. 그러나 그런 [[나가코 황후]]도 젊은 시절엔 똑같았다. 사실 그녀 역시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데이메이 황후]])에게 30여년간 호된 [[시집살이]]를 당했다고 한다. 군기잡기, 꼰대질을 당했던 사람이 당한 것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놀랄 일도 아니다. 사다코 태후의 [[시녀]] 다케야 츠네코(竹屋津根子)와 나가코 황후의 시녀 다케야 시게코(竹屋志計子)는 친자매였지만, 웃전들의 기싸움으로 인해 서로 눈치를 보며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평소에도 나가코 황후를 고깝게 보던 사다코 태후는 자신이 꾸짖고 싶으면 시녀에게 말을 대신 전해서 두 배로 긴장하게 했는데 한번은 [[다이쇼 덴노]]가 죽기 얼마 전 시절, 황태자 부부가 문병을 왔을 때였다. [[나가코 황태자비]]는 그동안 어지간히 시달린 터라 시어머니 [[사다코 황후]]의 앞에서 너무 긴장하여, [[장갑]]을 낀 채로 젖은 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때 사다코 황후는 "너는 무엇을 해도 서투르구나!!"라고 시종들도 있는 앞에서 [[나가코 황태자비]]를 꾸짖었다고 한다.[* [[장갑]]([[오페라 글러브]])에 대한 악몽은 며느리 [[미치코 황후]]와 손자며느리 [[키코 비]]에게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나가코 황태자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사실 [[사다코 태후]]와 [[나가코 황후]]의 고부갈등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나가코 황후는 방계 황족 가문의 적녀이지만 사다코 태후는 [[화족]], 그것도 서녀이다 보니 며느리보다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고, 이 탓에 심각한 열등감에 휩싸여 자신의 열등감을 나가코 황후를 괴롭히고 들볶으면서 해소시키려 했다는 설이 있다. 게다가 성격 차이도 있었고, 아들만 4명을 낳은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와 달리 나가코 황후는 첫째부터 넷째까지 줄줄이 딸만 낳았는데, 이 역시 좋은 시집살이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고준 황후]]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은 [[일본 육군]] 대장으로, 1928년 [[대만]] 시찰 도중에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의 의거로 상해를 입어 다음 해에 사망했다.[* 일본 황족 중에서는 노환이나 병사같은 자연사가 아니라 최초로 암살기도에 의한 타살(후유증)로 죽은 인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